언어는 하나의 사고 체계
언어는 기능이라기보다 하나의 사고체계라고 보는 편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즉, 언어란 한 언어 집단이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를 결정적으로 반영하고 거꾸로 언어 체계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이 결정된다는 말이다. 사실 언어를 배우는 데 있어서 이 점이 정말로 중요한데 예를 들어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우리나라 말과 영어가 얼마나 그 근본적인 사고체계에서 차이가 나는지 이것을 보면 절실히 드러난다.
첫째, 우리나라 사람들과 미국사람들이 주소를 어떻게 적느냐 하는 것에서도 이러한 언어 체계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미국사람들은 우편물에 주소를 적을 때 제일 먼저 사람이름을 먼저 적고 그 다음 줄을 바꿔서 번지수를 적는다. 그 다음에 길 이름을 적고 다시 줄을 바꾼 후 동네이름을 적으며 그 뒤에 주 이름을 적는다. 그리고 주 이름 뒤에 마지막으로 우편번호를 기입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제일 먼저 미국의 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도 이름을 적고 다음에 시나 군 이름, 그 다음에 동네 이름, 번지, 그리고 사람이름을 적는다. 미국사람들의 주소 적는 관습과 완전히 거꾸로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미국 사람들은 항상 적은 것을 먼저 생각하고, 즉 최종 목적지를 먼저 생각하고 갈수록 범위를 넓혀 나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최종 목적을 먼저 밝힘으로써 중간에 딴 곳으로 샐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는 말이다.
먼저 사람 이름을 적음으로써 받을 사람을 분명하게 밝혀버린다. 그 다음 가장 작은 단위인 번지수를 적음으로써 목적지를 분명히 정해버린다. 그 다음에 우편물을 배달할 수 있게 큰 단위인 길 이름, 동네 이름, 주 이름 순으로, 즉 큰 단위를 향하여 나아간다. 사람 이름과 번지수를 적음으로써 그 외의 내용은 자동으로 그렇게 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에는 제일 먼저 도나 특별시, 광역시 등 가장 큰 행정단위를 적음으로써 그 다음에 얼마든지 다른 곳을 향할 수 있는 여지가 남겨져 있게 된다. 그리고 다시 시나 군을 적어나감에 따라서 역시 그 다음 행선지도 얼마든지 다른 곳을 갈 가능성이 남아있게 되고 마지막에 사람 이름을 쓸 때까지 여전히 최종 수취인이 불분명하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망설이게 된다. 명절 선물을 보낼 때 어머니 이름을 적을까 아버지 이름을 적을까 망설일 수밖에 없다. 최종 결정을 계속해서 미루고 미루다 마지막에 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영어는 최종 결정을 항상 제일 먼저 함으로써 말이 중간에 다른 곳으로 빠질 가능성을 애초에 차단하게 된다.
이 얼마나 커다란 사고방식의 차이인가! 세상을 보는 눈이 영어를 쓰느냐 한국어를 쓰느냐에 따라서 항상 이렇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문장 속의 구에서도 이런 차이는 그대로 드러난다. the boy on the room 이라는 말을 예로 들어보자. 이 말의 한국어 번역은 '그 방에 있는 그 소년'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그런데 여기서도 영어는 최종 목적인 the boy를 가장 먼저 말한다. 그리고 나서 그 소년을 수식하는 형용사구를 말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말은 어떤가? 먼저 그 소년을 수식할 말을 잔뜩 하고 나서야 최종 목적인 그 소년을 말한다. 그래서 '그 방에 있는' 이라는 말을 할 동안 언제라도 생각을 바꿔서 다른 말로 돌릴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렇지만 영어는 이미 최종 목적을 말해버렸기 때문에 중간에 말을 바꾸거나 돌린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언어습관에서 미국사람들의 합리성과 논리성, 그리고 차가운 감성 등이 발달하게 되고 한국사람들은 반대로 비논리적이며 감성에 의존하는 사고구조가 발달하게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실, 우리나라 말은 정말 하기가 어렵다. 처음에 말하려고 한 의도가 말하는 중간에 잊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고 그렇게 되면 문장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오리무중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의 예에서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세 번 째 예는 영어에 있어서 동사와 우리나라 말의 술어의 위치이다. 영어에서 동사는 우리나라 말의 술어에 해당한다. 그런데 영어는 주어를 소개한 다음 바로 동사를 말함으로써 최종 목표를 철저하게 못박아 버리는 반면 우리나라 말은 술어가 문장의 제일 끝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말을 해 나가는 도중에 얼마든지 최종 목적지를 다른 곳으로 바꿀 기회가 있게 된다. 그리고 말을 길게 하다 보면 최초의 주어가 무엇이었는지 중간에 목적어가 무엇이었는지 잊어먹는 수가 가끔 발생해서 완전히 횡설수설을 하게 된다.
그러나 영어는 말하는 도중에 처음 했던 말을 잊어먹어도 나중에 말을 빼먹어도 기본적으로 전할 말은 이미 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기껏해야 형용사구나 절 부사구나 절 등이 빠지게 된다. 그러나 주어와 동사, 그리고 바로 그 다음에 목적어 등 중요한 말을 다 했기 때문에 핵심적인 내용은 다 전달했다. 반면에 우리나라 말은 목적어조차도 그 앞에 목적어를 수식하는 형용사절이라도 몇 개 있으면 한참 뒤에 말하게 되어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뭘 목적어로 써야 할지 아리송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TV에서 길거리 인터뷰 등을 하면 문장이 제대로 안 되게 횡설수설하는 경우가 허다하게 많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예에서 보듯이 언어란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한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의 사고구조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고구조가 비슷한 언어를 습득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며 또 두 언어를 거의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할 가능성도 많다. 사고 구조가 같기 때문에 단어만 다른 것으로 대치하면 그대로 그 나라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고구조가 완전히 거꾸로 뒤바뀐 우리나라 말과 영어를 동시에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항상 이 두 언어 사이에는 소프트웨어적인 번역의 작업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즉, 영문 윈도우에 한글 소프트웨어를 깔아서 한글을 구사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