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느끼면서...

조승희 사건을 통해서 미국인이 배워야할 교훈

돌김짱 2007. 5. 5. 15:19
조승희의 버지니아 공대 학살사건으로 연일 언론의 보도가 뜨겁다. 그리고 세간의 여론도 분분하다. 33명의 고귀한 생명이 한순간에 운명을 달리한 것은 어떤 말로도 정당화할 수 없고 또 충분한 위로가 되지도 않는다. 진심으로 고인이 된 분들의 명복과 그 가족들의 슬픔에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나는 이 사건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아무리 많은 위로를 전하고 슬픔을 함께 나누어도 지나침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이 사건으로부터 미국과 미국인이 배워야할 교훈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불행한 사건일수록 그 사건에서 교훈을 배우고 다시는 그런 사건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최선의 예방책을 강구해야 할 필요성과 당위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을 놓고 많이 회자되는 사건이 911 테러사건인데 이 테러사건도 외국인이 저지른 사건이지만 미국민들은 그들 국적인들에게 보복을 가하는 짓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한국사람들이 보복을 당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낙관적인 분석을 하고 있다.

그런데 911사건과 이번 사건은 그 성격이 많이 다르다. 911은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동기가 있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은 곧바로 국가에 의해서 그 사건의 책임당사자라고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과 그를 보호해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대한 보복이 행해졌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동기로 발생한 사건이고 따라서 국가가 국민들 대신 어떤 카타르시스도 해 줄 수 없는 여건이고 게다가 상당부분 증오범죄의 성격도 짙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정확한 예상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점이 911과 이 사건을 근본적으로 다른 사건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911의 본질은 미국의 세계패권주의와 제국주의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미국민들은 미국 정부와 함께 빈 라덴의 테러라고 하는 점에만 주목한 나머지 자신들이 진정으로 깨달아야할 교훈을 배울 것을 거부함으로써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이라고 하는 더욱 큰 역사적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따라서 커다란 사건일수록 그 사건을 통해서 그 사회가 교훈을 얻고 그 교훈에 입각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더욱 큰 사건의 악순환을 피할 길이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 사건을 두고 미국민들이 다음 두 가지 교훈을 배우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첫째, 나는 미국민들이 인종차별이 얼마나 무서운 범죄인가를 깨닫기를 바란다. 나는 조승희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충분히 인지하고 그의 죄악상에 대해서 다른 어떤 사람 못지않게 분노를 공감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 편 그가 왜 그렇게 잔악무도한 사람이 되었을까, 그런 잔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증오심이 생겼을까 하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한국에서는 가난한 집의 내성적인 어린아이였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가난으로 인해서 사회에 대한 반감이 조금씩은 싹이 텄을 것으로 짐작을 한다. 그런 사회에 대한 반감이 무의식적으로 자라나고 있던 어린 아이가 미국이라는 사회에 가서 거기 학교에 입학을 하고 거기서 학교를 다녔다.

학교 다니는 자녀를 둔 많은 한국 이민자들은 미국 학교에 인종차별이 없다고 강변을 한다. 그러나 미국 학교 내의 인종차별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어린 초등학생들이 벌써부터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유색인종 학생들을 차별한다. 교사들도 유색인종 학생들에게는 관심을 덜 가지고 대하는 게 사실이다. 어린 나이에 마음에 상처를 줄 일은 학교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교실 내에서, 그리고 학교 안에서 왕따를 당하는 건 아주 기본적인 것이고 생일파티에 유색인종 아이들만 초대받지 못한다거나 생일파티에 초대했는데 백인 아이들은 대부분 나타나지 않는다거나 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난다.

선생님들은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유색인종 아이들이 백인 아이들에게 왕따 당하는 문제에 대해서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순히 언어가 문제가 있어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되어 그렇다고 쉽게 생각해버리고 만다. 부모가 그 사실을 알고 담임 선생님께 해결책을 부탁해도 말만 할 뿐 별로 신경을 쓰지도 않고 또 해결의 길이 별로 없는 것도 사실이다.

내성적인 아이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면서 더 내성적이 되어가고 한국에서 가난 때문에 가졌던 사회에 대한 불만이 이제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분노로 증폭되고 증폭된 분노는 자신의 내면의 창고 안에 차곡차곡 쌓여져갔던 것이다. 학교에서의 인종차별은 초등학교에서는 왕따와 생일파티 초대 안 하고 안 가기 정도로 진행되다가 중학교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인생에 대한 설계에서 차별을 느끼게 된다. 즉, 유색인종은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주류인 백인들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고 차별 받는다는 느낌을 수시로 받으면서 학교생활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심각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유색인종의 아이들, 그 중에서도 한국아이들의 고민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이들은 부모들이 자신들은 영어가 모자라서 미국에서 고생하지만 자식들은 영어를 제대로 하니까 미국 땅에서 어메리칸 드림을 성취하며 잘 살 것이라고 기대를 하고 있는데 자기네들이 경험하는 미국 세계는 그런 부모들의 꿈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사회라는 것을 학교를 다니면서 쉬임 없이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 사고를 가진 부모들과는 얘기를 해 봐야 통하지도 않고 또 부모가 이해를 한들 뾰족한 해결책이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그냥 부모들과 소통을 끊고 산다.

내가 미국에 살면서 경험한 것을 하나 예로 들자면, 미국에서 사는 한국인 1.5세나 2세들이 부모들과는 거의 대부분 영어로만 소통을 하려고 하는데 그러나 의외로 이들이 한국말을 잘 한다는 것이다. 즉, 부모들에게 영어로만 말하고 한국말은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한국말을 못해서가 아니라 부모와 깊은 얘기를 피하기 위한 일종의 전술이라는 점이다. 한 번은 뉴저지의 안정되고 자리잡은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의 고등학교 앞에서 점심을 먹은 적이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길 건너 고등학교에서 점심시간이 되었는지 아이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나와서는 내가 있는 패스트푸드 점으로 밀려들어왔다. 개중에는 한국아이들이 수 십 명이 섞여 있었다(주로 한국아이들과 히스패닉계 등의 소수인종 절반 백인 절반 정도의 비율로 아이들이 들어왔다).

나는 의외의 광경을 목격하게 되어서 유심히 관찰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거기 들어온 수 십 명의 한국 아이들이 한국말을 유창하게 잘 할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그 당시 최신 비어들과 은어들조차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아이들이 뭉쳐 있는 곳에 백인 아이들이 끼어 들어 있는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 한국말을 도사처럼 하는 아이들이 다른 백인 아이들에게 말을 하는 걸 들어보면 발음이나 영어의 유창함으로 볼 때 갓 이민 온 아이들이 아니라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2세이거나, 적어도 이민 온 지 10년 이상 지난 1.5세는 충분히 될 정도였다.

저렇게 자기네들끼리는 한국말을 잘 하고 거의 모든 의사소통을 한국말로 하면서 막상 부모나 한국 사람 앞에서는 한국말을 잘 못하는 척하면서 영어로만 말을 하는구나, 그래야 한국사람과 골치 아픈 말을 안 해도 되니까 바로 저게 자구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동정심이 끓어올랐다. 당시 우리 아이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우리 아이도 왕따를 많이 당했고 전학을 와서 우리 아이보다 나중에 같은 학교에 들어오게 된 다른 한국 아이들은 훨씬 더 심한 왕따를 당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면서 이 고등학생들의 일이 바로 나의 문제로구나 하는 점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한국 아이들 중에서는 성격이 활달하고 사교적이어서 백인 아이들과도 잘 사귀고 친구를 만드는 아이들도 간혹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인종차별과 특히 학교 내에서의 차별은 어린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고 십여 년의 학교생활에서 만들어져 온 그 상처 속에 증오와 반항의 감정들을 차곡차곡 채워나가기에 충분한 여건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나는 미국 사회와 미국인들이 조승희가 그런 증오심과 적개심을 가지게 된 근본 원인을 찾아서 그런 인종차별적인 증오범죄가 얼마나 커다란 비극을 불러올 수 있는지를 깨닫고 조금이라도 인종차별을 덜 하는 사회로 진화해 나가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과거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에서 애매한 중국인을 디트로이트의 길거리에서 때려 숨지게 하고, 자기와 맞지 않은 성적 취향을 가졌다고 야구방망이로 때려 숨지게 하며, 동양인에 대한 적개심으로 지나가는 동양인에게 무작위로 총질을 해서 몇 명의 동양인을 숨지게 한 그런 복수극적 증오범죄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다시 고개를 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며 그 마음에 앞서서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 뒤따랐으면 하는 바람인 것이다.

두 번째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제 총기 휴대에 대한 자유와 환상을 제발 버려달라는 것이다. 더 이상 총기는 나를 보호하는 호신용 무기가 아니다. 내가 산 무기에 내 목숨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아 주기를 바란다.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결과가 하나같이 지칭하기를 총기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들보다 총기로 목숨을 잃거나 다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기소지 지지자들은 총기가 자신들의 안전을 더 높여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국 국내에는 경찰이나 군대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순수 민간인 소지의 총이 1억 5천 만 정 이상 유통되고 있다고 한다. 무려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일인당 3-4자루 씩 소지할 수 있는 양이다. 줄잡아 미국인 2명당 한 자루 이상의 총을 소지한 셈이다. 우리는 안전을 위해 칼 한 자루도 조심해서 다룬다. 잘못하면 나와 가족과 이웃을 다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구 두 명당 하나 꼴로 사람을 죽일 목적으로 제작된 총이 유통되고 있다니 기가 막힌 현실이다.

물론 한 명의 생명도 더 없이 귀중하다. 그런데 이렇게 귀중한 생명을 여분으로 32명이나 더 죽일 수 있었던 것은 뭐니뭐니 해도 총기휴대의 자유 때문일 것이다.

미국인들이여! 이제 제발 인종차별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물론 대한민국에도 인종차별은 존재한다. 인종차별 이전에 지역차별이라는 희안한 괴물도 존재한다. 그러나 다인종사회인 미국의 인종차별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와 그 결과의 심각성은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안 된다. 그것은 미국이란 나라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하루라도 빨리 미국 사회에 내재하고 있는 인종차별의 뿌리를 제거하고 보다 더 평등하고 진정으로 모든 사람에게 기회의 땅이 될 수 있는 나라로서, 또 그 문화를 가진 사회로서 나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이제는 충분하게 검증된 총기 휴대의 불합리성을 확실하고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제발 사회에서 총을 거둬들이자.